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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영어로 논문 쓰기

Ummae~@ 2018.06.17 14:22

한국어가 더 편하면 한국어를 쓰세요

대학원 시절, 볼품없는 논문을 여러 개씩이나 썼다. 대부분은 국내 학회에 낸 것이었지만 일부는 해외 학회에도 냈다. 다 비슷한 내용으로 3편 정도 해외 학회에 낸 것 같다. 당시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던 나는 논문을 영어로 쓴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영어로 된 전공 서적이나 논문을 읽는데도 버거운 시절이었는데, 글쓰기라니.


졸업을 하고 회사 생활 첫 2-3년 동안은 회사 업무로서 논문을 몇 편 더 썼다. 이때도 국내 학회와 해외 학회에 냈다. 그리고 영어 논문은 여전히 한국어로 쓰고 어느 정도 완성되면 영어로 번역하는 순서로 작업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몇 년간은 논문 작업을 하지 못했다. 할 생각은 있었는데, 실무도 바빴고, 개인적인 시간 여유도 부족했다.


최근에 한 팀원이 업무 성과를 논문으로 썼다. 해외 학회에 제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승인되었다. 논문에서 언급된 기반 기술은 내가 직접 고안한 것이기도 했고, 팀과 회사가 언급되는 논문이므로 팀장으로서도 논문 검토를 해야 했다. 

 

옆에서 논문을 쓰는 것을 지켜보다 그 팀원이 처음부터 논문을 영어로 쓴 것을 알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래는 그 당시 슬랙이라는 메신저로 나눴던 대화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A가 논문을 쓰던 팀원이다.


나: 그런데 페이퍼 한국어 버전은 없나요? 한국어 버전이 없으면 번역 교정을 하려고 해도 원뜻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네 바로 영어로 진행해서 한국어 버전은 없는 상태에요


나: 이건 질문인데요. 저는 영어로 바로 쓴 적이 없어서 그런데. 영어로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리뷰를 받을 때 어떻게 하나요? 본래 뜻을 물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종종 발생할 것 같은데요.


A: 전 학교다닐땐 크게 문제가 없었던것 같아요. 교수님이 미국인이라서? 오히려 영어로 바로 쓰라고 압박 받는 환경이라.


나: A가 쓴 뜻을 제대로 이해 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A: 넵 그럴것 같아요 그건 우리 팀에 맞게? 진행할게요.


나: 한국어에 비해 그런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동안 문제가 없었다고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번역 교정이라는게.. 본래 의도가 최대한 명확히 있어야 하는데. 이미 영어로된 것만 있으면 교정을 할 때 좀 애매할 것 같아요. 그러면 문맥을 고려하기 보다는 단순 문법 교정만 될 것 같은데 이게 원래 의도라면 괜찮고요.


우리 팀에 맞게(?)라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팀이 일반적인 글쓰기의 규칙에 있어서,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곳이란 뜻일까? 말꼬리를 붙잡을까 하다가 넘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해외 학회던 국내 학회던 한국어로 논문을 써왔다. 그 방법이 논문을 쓰는 데 있어 썩 나쁘지 않은 방식인 데다가, 그럭저럭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어디 대단한 곳에 제출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승인됐기에, 결과에 대한 자기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영어로 논문을 쓴다는 것 자체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생각에 빠졌고,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한국인이라면 한국어로 쓰는 것이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다.

2. 글의 품질도 더 좋을 것이다.

3. 공동작업을 할 때, 글로서(논문으로서) 서로 간의 생각을 주고받기에도 더 편리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정리한 생각을 A에게 말로 다시 한번 전달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이 일을 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책을 하나 읽기 전까지는...


얼마 전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과 훈련법을 소개하는 글인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유익하고 재밌어서 금세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컸던 부분이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외국어로 논문을 쓰는 것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이었다.


저자가 독일 유학 생활 중 논문을 쓰던 일화와 외국어로 논문 쓰기에 대한 생각을 얘기할 때, 내가 겪었던 이 일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짧다. 주제넘게 판단하는 것이지만 유시민의 생각도 내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저자가 책에서 설명한 이유와 근거를 읽고 나니 내가 내렸던 결론을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유명인이자 유식하고 말 잘하는 사람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어로 쓰는 것이 영어로 쓰는 것보다 당연히 더 쉽다. 외국어라는 말뜻 자체가 그걸 말해준다. 모국어라면 더 다양한 어휘와 전달력 높은 문장으로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다. 외국어를 모국어 정도로 잘하기 위해서는 다중언어 능력자에 해당하는 능력을 지녔거나 정말 오랜 기간 해당 언어에 대해 학습을 했어야하는데 두가지 경우 모두 드물다. 


대학원 시절 내가 썼던 한국어 논문에 대한 심사평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논문 심사를 맡았던 교수는 나에게 글 쓰는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이다. 누구 탓을 하리, 내가 논문을 한국어로 쓰면서도 조리 있게 쓰지 못했던 탓이다.


내게 글 좀 똑바로 쓰라고 훈계 어린 심사평을 남겼던 교수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승인됐으니 논문에서 말하려는 주장이 무의미하거나 논증이 이상했던 것 같진 않다. 내 생각에는 글 전반적으로 의미가 모호한 문장과 불필요하게 긴 문장, 잘못된 수식어구들 이런 것들이 난무해서일 것 같다. 잘못된 띄어쓰기, 맞춤법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것 때문에 논문의 당락이 결정되진 않았으리라(완성도에서 중요한 문제이지만).


교수는 내 논문을 읽으면서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잘 읽히지도 않고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앞뒤로 시선을 옮겨가며 다시 읽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내 논문은 살아남았다. 못쓰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겠지. 내 글쓰기가 아주 훌륭히 했다면 어땠을까. 심사평이 조금은 더 좋았으리라. 하지만 만약 내 글의 논리, 주장에 중요한 결함이 있었다면 절대 승인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어 글쓰기의 한 가지 문제점은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글로 옮기는 과정이 모국어 대비 불필요하게 길어지고,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구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논문처럼 비교적 길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글쓰기는 모든 내용을 머리에 담기 어렵다. 그래서 생각을 글로 적고 그것을 다시 보면서 글과 생각을 고쳐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영어라는 외국어를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적 낭비와 사고의 저해가 발생하는 셈이다. 


말하고자 하는 주장과 논증을 얼마나 치밀하고 깊이 있게 고민했느냐가 최종적인 글의 품질을 결정짓는다. 한국어든 영어든 받아쓰기를 잘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핵심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같은 내용이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훨씬 쉽고 짧게 설명해주듯이, 고민의 깊이 중요하고 생각을 더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하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언어로 논문을 쓰고, 마지막에 번역을 해라.번역을 다른 전문가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글의 내용은 내가 구상하고 다른 언어지만 모국어로 썼으니 말이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전문 번역가에게 교정을 받는 경우도 많다. 크게 다른 일이 아니라고 본다.


공동작업을 할 때, 글로서(논문으로서) 서로 간의 생각을 주고 받기에도 모국어를 쓰는 편이 더 편리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내가 A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거친 절차는 이렇다. 먼저 A가 쓴 영어로 된 초안을 읽는다. 영어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번역한 뒤 그 뜻을 생각한다. 가끔은 사전도 찾아본다. 그 뜻이 잘 이해된다면 다행이지만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원래 뜻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오역을 했는지 혹은 A가 영어를 잘못 쓴 것인지 판단한다. 어찌어찌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 의견을 말로 전하거나 글로 전한다. 도무지 모를 때는 직접 물어본다.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은 모두 한국어로 한다. 영어가 아니다. 이 부분이 재밌는 부분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기도 하다. 서로가 그게 더 편하고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A도 생각은 모국어인 한국어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글은 영어다. 그 글을 읽는 나와 다른 검토자들도 모국어가 한국어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번역한 뒤 한국어로 이해한 다음 그에 대한 의견을 다시 한국어로 준다. A는 의견에 대해 한국어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다시 영어로 옮겨썼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의사소통할 때 모국어가 제일 편하다는 것을 검토자와 A 모두 알고 있는데, 영어로 쓴 글 때문에 모두가 불필요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셈이다. 논문을 검토하는 단계에서는 영어 철자, 문법, 띄어쓰기를 지적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과 논증을 검증하고 토론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영어로 글을 씀으로써 이런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진다. 더불어 시간도 더 걸린다.


논리적 글쓰기는 한국어로 하자. 영어로 그만큼의 글을 쓸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영어로 쓰면 된다. 어떤 것이 더 옳은지, 맞는지 모르겠다면 두 가지 방법 모두 해보면 된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옳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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